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는 그냥 살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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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18-05-25 17:58
조회
8
안산에서 작은 집을 얻어 ‘만남의집’이라는 기도와 생활 나눔 공간을 할 때였다. 새벽과 저녁, 하루 두 번씩 모여 기도시간을
가지고 쉬기도 하고 성경도 보고 그랬다.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오신 목사님도 있다가 가셨고,
에스페란토 세계대회에 참석차 중국에서 온 분도 열흘가까이 지내다 가셨다.
한 번은 예수의 작은형제회 소속인 형제님이 와서 만남을 가졌다. 생활나눔을 가지고 말씀도 듣고 밤이 되었다.
잠이 오지 않아 마당으로 나갔더니 그곳에 별을 보며 쉬고 계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질문 하나를 했다.
“하는 일이 잘 안 풀리고 사람들도 진심을 몰라주어 마음이 상할 때, 형제님은 어떻게 하시는지요?”
잠시 생각을 해보던 형제님은 아주 간단하게, 정말 설명도 더할 필요 없는 말을 하셨다.
“그냥 살지요”
“..........”
내가 ‘이렇게 저렇게도 해보고, 설명도 해보고, 기도도 하고 다 해보아도 안 될 때’ 라고 했었기 때문에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더 해볼 게 없는 상태니...
그 뒤로 일이 꼬이거나 오해를 받아 속상하거나 할 때면 그 짧은 말이 자꾸 떠올랐다. 그분들은 샤를르 푸코라는 청빈과
묵상의 삶을 수련하는 수도회 소속으로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세를 얻은 잠자는 숙소에서 기도회를 가지며 살아가는 분들이다.
그러니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잘 알기에 그 무게와 깊이가 남 달랐다.
요즘 요셉의 여정이 그 말씀과 겹치면서 자주 떠오른다.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구덩이에 빠지고 팔려가는 억울함이 얼마나 고통스 러웠을까? 그러나 그는 악을 쓰거나 비탄과 좌절에 빠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애굽에서 성실하게 밝게 살았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신뢰를 받거나 승진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겨우 잘되려고 할 때 또 억울한 지경에 빠졌다. 보디발의 아내가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바른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그가 억울함만을 소리치고 욕하고 굶고 자살이라도 했다면 다음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그냥 살았다’ 정말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술 만드는 관리와 떡 만드는 관리의 꿈을 해몽하고 댓가를 바로 받지 못하고 또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요셉은 이번에도
‘그냥 살 았다’ 말도 안 되는 연속적인 억울한 인생에도...
집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같이 만났던 분이라 기억을 하고 있었다. 요셉이야 말 할 필요도 없이 잘 아는 이야기이고!
지금도 아내는 늘 아프고, ‘왜? 내게...’ 라는 질문을 가지기 시작하면 자꾸 빠지는 구덩이에 들어가 있다. ‘그냥 살아야지 뭐...’
세상에는 변명이나 절규를 해도 안 풀리는 일도 있다. 그냥 사는 방법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경우가,
그럴 때면 ‘그냥 살아야지’ 이 말을 되새겨본다.
그러나 요셉은 체념이나 좌절한 ‘그냥’이 아니었다. 그렇게 의욕 없고 무기력한 표정으로 살았다면 결코 성실하게 지혜롭게 살
기운이 나올 리가 없다. 되는대로 포기하고 사는 사람이 남에게 신뢰를 받을 수도 없고, 남들이 귀담아 들어줄 리가 없다.
그는 하나님께 가는 날까지 억울함을 가슴에 담고도 ‘그냥’ 살아간 참 본이었다.
어떤 사람이 약육강식, 힘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잔인함을 보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본래 사람을 죽지 않고 살게 하셨고, 동물들도 모두 풀을 먹고사는 초식동물로
만드셨다고 했다. 에덴동산에서 그랬고, 노아의 방주에 들어갈 때도 각 종류별로 한 쌍씩 태웠는데 먹을 것은 풀만
준비하였다고 했다. 만약 육식을 하는 상황이었다면 내릴 때는 사자 한 쌍만 내렸을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하늘의 물과 땅의 물로 나누어 지구를 둘러싸게 했던 물을 하늘의 문을 열고 다 쏟은 후부터 사람은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어
급격한 수명 단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몇 백 년에서 불과 백 살 전후로...
그때부터 육식과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어 갔다고 한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그날이 오면 사막에 꽃이 피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놀며 고기를 먹지 않는 상황은 없던 것을 새롭게 주는 방식이 아니라 원래 있던 사는 방식을 회복해주시는 거라 하셨다.
사람도 본래의 영생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지금도 모든 죽이고 망치는 것들을 하나님은 언제나 회복시키고 살려내시는 중이란다.
그러니 가끔씩 원망 비슷하게 왜 병들고 고통을 가지고 살다, 늙고 죽게 만드셨나 하는 의문을 계속 할 수가 없다.
사람에게 준 자유의 의지와 선택권을 사용한 것은 사람이었다.
그건 예전 아담이고, 노아 때 사람들이지 나와 상관없는데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지금도 정말 선택의 순간마다 나는 옳은 것만, 졍결한 길만 선택하며 사는지를 돌아보자.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완벽하게 자신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그러니 그 부실의 댓가를 받을 수밖에...
그래서 나도 집사람도 이 억울하다 속상하다 싶은 마음을 ‘그냥 살아야지’로 버티려고 한다. 누구를 탓할 수 있다고...
그러나 그렇다고 퉁퉁 불은 얼굴이 아니라 요셉이 보여준 적극적이고 밝은 표정의 ‘그냥 살아야지’로 살고 싶다!
“한없이 누군가를 물고 탓을 돌리다보면 이 땅에는 모두 물고 늘어지는 사람과 물린 사람만 살게 된다.
‘그냥 살아주는’ 사람이 늘어나면 좀 더 평안하고 따뜻한 세상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쓰신 분은 오랜동안 지병으로 앓고 있는 아내를 돌보시며 사시는 분입니다. 투병중인 아내를 병원에서
돌보시며 겪는 일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좋을 글이지요)
가지고 쉬기도 하고 성경도 보고 그랬다.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오신 목사님도 있다가 가셨고,
에스페란토 세계대회에 참석차 중국에서 온 분도 열흘가까이 지내다 가셨다.
한 번은 예수의 작은형제회 소속인 형제님이 와서 만남을 가졌다. 생활나눔을 가지고 말씀도 듣고 밤이 되었다.
잠이 오지 않아 마당으로 나갔더니 그곳에 별을 보며 쉬고 계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질문 하나를 했다.
“하는 일이 잘 안 풀리고 사람들도 진심을 몰라주어 마음이 상할 때, 형제님은 어떻게 하시는지요?”
잠시 생각을 해보던 형제님은 아주 간단하게, 정말 설명도 더할 필요 없는 말을 하셨다.
“그냥 살지요”
“..........”
내가 ‘이렇게 저렇게도 해보고, 설명도 해보고, 기도도 하고 다 해보아도 안 될 때’ 라고 했었기 때문에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더 해볼 게 없는 상태니...
그 뒤로 일이 꼬이거나 오해를 받아 속상하거나 할 때면 그 짧은 말이 자꾸 떠올랐다. 그분들은 샤를르 푸코라는 청빈과
묵상의 삶을 수련하는 수도회 소속으로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세를 얻은 잠자는 숙소에서 기도회를 가지며 살아가는 분들이다.
그러니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잘 알기에 그 무게와 깊이가 남 달랐다.
요즘 요셉의 여정이 그 말씀과 겹치면서 자주 떠오른다.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구덩이에 빠지고 팔려가는 억울함이 얼마나 고통스 러웠을까? 그러나 그는 악을 쓰거나 비탄과 좌절에 빠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애굽에서 성실하게 밝게 살았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신뢰를 받거나 승진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겨우 잘되려고 할 때 또 억울한 지경에 빠졌다. 보디발의 아내가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바른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그가 억울함만을 소리치고 욕하고 굶고 자살이라도 했다면 다음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그냥 살았다’ 정말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술 만드는 관리와 떡 만드는 관리의 꿈을 해몽하고 댓가를 바로 받지 못하고 또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요셉은 이번에도
‘그냥 살 았다’ 말도 안 되는 연속적인 억울한 인생에도...
집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같이 만났던 분이라 기억을 하고 있었다. 요셉이야 말 할 필요도 없이 잘 아는 이야기이고!
지금도 아내는 늘 아프고, ‘왜? 내게...’ 라는 질문을 가지기 시작하면 자꾸 빠지는 구덩이에 들어가 있다. ‘그냥 살아야지 뭐...’
세상에는 변명이나 절규를 해도 안 풀리는 일도 있다. 그냥 사는 방법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경우가,
그럴 때면 ‘그냥 살아야지’ 이 말을 되새겨본다.
그러나 요셉은 체념이나 좌절한 ‘그냥’이 아니었다. 그렇게 의욕 없고 무기력한 표정으로 살았다면 결코 성실하게 지혜롭게 살
기운이 나올 리가 없다. 되는대로 포기하고 사는 사람이 남에게 신뢰를 받을 수도 없고, 남들이 귀담아 들어줄 리가 없다.
그는 하나님께 가는 날까지 억울함을 가슴에 담고도 ‘그냥’ 살아간 참 본이었다.
어떤 사람이 약육강식, 힘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잔인함을 보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본래 사람을 죽지 않고 살게 하셨고, 동물들도 모두 풀을 먹고사는 초식동물로
만드셨다고 했다. 에덴동산에서 그랬고, 노아의 방주에 들어갈 때도 각 종류별로 한 쌍씩 태웠는데 먹을 것은 풀만
준비하였다고 했다. 만약 육식을 하는 상황이었다면 내릴 때는 사자 한 쌍만 내렸을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하늘의 물과 땅의 물로 나누어 지구를 둘러싸게 했던 물을 하늘의 문을 열고 다 쏟은 후부터 사람은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어
급격한 수명 단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몇 백 년에서 불과 백 살 전후로...
그때부터 육식과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어 갔다고 한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그날이 오면 사막에 꽃이 피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놀며 고기를 먹지 않는 상황은 없던 것을 새롭게 주는 방식이 아니라 원래 있던 사는 방식을 회복해주시는 거라 하셨다.
사람도 본래의 영생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지금도 모든 죽이고 망치는 것들을 하나님은 언제나 회복시키고 살려내시는 중이란다.
그러니 가끔씩 원망 비슷하게 왜 병들고 고통을 가지고 살다, 늙고 죽게 만드셨나 하는 의문을 계속 할 수가 없다.
사람에게 준 자유의 의지와 선택권을 사용한 것은 사람이었다.
그건 예전 아담이고, 노아 때 사람들이지 나와 상관없는데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지금도 정말 선택의 순간마다 나는 옳은 것만, 졍결한 길만 선택하며 사는지를 돌아보자.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완벽하게 자신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그러니 그 부실의 댓가를 받을 수밖에...
그래서 나도 집사람도 이 억울하다 속상하다 싶은 마음을 ‘그냥 살아야지’로 버티려고 한다. 누구를 탓할 수 있다고...
그러나 그렇다고 퉁퉁 불은 얼굴이 아니라 요셉이 보여준 적극적이고 밝은 표정의 ‘그냥 살아야지’로 살고 싶다!
“한없이 누군가를 물고 탓을 돌리다보면 이 땅에는 모두 물고 늘어지는 사람과 물린 사람만 살게 된다.
‘그냥 살아주는’ 사람이 늘어나면 좀 더 평안하고 따뜻한 세상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쓰신 분은 오랜동안 지병으로 앓고 있는 아내를 돌보시며 사시는 분입니다. 투병중인 아내를 병원에서
돌보시며 겪는 일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좋을 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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